대상을 이해하고
유년기의 아이는 말(발언)하지 않는 사람이다. 고로 말 할 권리가 없는 사람인가.
정체성 탐구 관점이 아닌 배우는 단계, 어른이 되어가는 전환기적 관점으로 대상을 보아야 한다.
따라서 어린이는 태어남으로 이미 완전한 사람이다.
물 웅덩이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야말로 순간에 집중해서 살고 있는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다.
아이들이 독립적이지 못함으로 어른과 어린이 사이 권력 관계가 형성된다.
권위와 순응의 관계는 어린이를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이해할 때, 완전한 사람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파괴된다.
창작하는 어른들의 권위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창작자가 가져야 할 숙제들
수잔르보 "예술의 만남은 두 사람의 친밀한 만남이다. 작가로써 나의 관점을 전달하는 것은 늘 고민이다. 어른으로써 아는 것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어른, 아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인가. 어른들이 내게 발언권을 주었다.
계속 질문해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법에 대하여"
어른들의 작품은 문제작도 괜찮다. 건전한 문제제기는 어른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난다. 그러나 어린이 작품에서는 문제제기를 어른들이 다루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질문 ① 주어진 조건 하에 어린이를 위한 글쓰기를 할 것인가.
그렇다면 도덕적, 예술적, 사회적 요구가 담긴 교육적 의미를 어떻게 담을 것인가.
질문 ② 어른인 작가는 어떻게 어린이 관객과 만날 수 있나.
철학적 관점에서도 아주 불공평한 관계이지 않나.
말 할 수 있는 배우가 있다. 공연이 끝날 때 마다 어린이 관객들은 배우를 찾아와 말을 건다.
말 할 수 없는 광대가 있다. 공연이 끝날 때 마다 어린이 관객들은 광대를 찾아와 몸으로 말을 건다.
도대체 왜? 어린이들은 연극 속 상황을 지키면서 대화할까?
사실과 무대의 경계가 모호한가? 확실히 전달할 수 있는 언어가 있나?
움직임과 행동 연구를 위한 '마임'과 '마리오네트'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의미를 전달한다.
아이들 만나보니
라디오에서 2주전 실종되었던 시체(body)를 발견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딸이 "엄마 머리(head)는 못 찾았나봐" 어린이들의 시적인, 단순한 생각, 또래의 지식, 유니크한 소통을 통해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해 배워나가고 있는 것.
수잔르보는 아동인지 발달, 언어 발달, 아동심리학 등 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3-5세 아동들과 주 4회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했다. 그 중 단어 50개를 가지고 가서 아이들에게 '내 방에 있으면 혼자 무엇을 할까'를 주제로 3개의 단어를 고르게 했다. 모든 결과에서 부모(어른)와의 권위 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내 방에 있으면 혼자 음악/자전거/여행 -> 부모 벗어나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
원작소설 '나는 다섯살때 자살했다' 라는 작품이 있다. 반은 어른이고 반은 어린 아이인 불안한 인간의 정서영역을 탐구하고 있으며 사회에 대한 어린이의 시선을 수용하고 있는 작품이다.
8세 남자 아이가 정신병원에 갇혀있다. 또래 여자 아이의 침대에 발가벗고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 두 명의 격렬한 논쟁이 펼쳐진다. 아이들은 아이편에 서서 의사직을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싸워 준 것에 대한 위안을 얻는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되지만 사실은 아이들이 이해 못할 것이라 여겨 빼려고 했던 장면이다.
누구도 이 작품에 대한 미학적인 부분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가? 그러나 아이들은 극 자체를 즐겼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얘기할 수 있을까
9세의 성폭행 피해 여아. 현실은 '나는 다섯살때 자살했다' 보다 가혹했다. 신문에는 이 아버지를 괴물이라 말했고 감옥에서 다른 수감자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아이를 보는 주변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모든 게 폭로된 이 시점에 어떻게 아이를 보호할 수 있을까.
선과 악의 욕망, 근친상간, 살인, 싸구려 물건을 파는 거리의 아이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이 현실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말 할 '권리'는 있는가?
동의를 구하고 아이들과 함께 다큐멘터리를 관람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13그룹에 같은 질문을 남겼다.
"너희 생각에 이 영상을 어른들이 보여줄 권리가 있을까?"
어린이들은 "권리뿐 아니라 의무도 가지고 있다"고 답한다. 어린이들은 조건과 상황을 보려고 했고 이 세상이 어른들이 말하는 이상적인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 상황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답길 바라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끔찍한 면 또한 모두 진실이다.
어린이는 희망을 보고 어른들은 절망을 보며 대화한다. 그러나 어린이도 어른과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어린이를 돌보고 보호한다는 것은 아이들을 원더랜드에 두고 오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생각처럼 순수하고 무지한 상태이지도 않다. 안데르센의 동화는 모두 현실에서 출발해서 마법으로 이어진다. 다 행복한 가짜 삶..
어린이와 어른을 위한 글쓰기는 모두 같다. 그러나 아동극에 리얼한 구원없는 현실을 그릴 것인가?
어린이를 위한 글쓰기에는 반드시 '희망'이 필요하다. 순수한 희생자의 모습은 관객(어린이)이 자신에 투영할 수 있기에 위험하다. 마지막에 작은 희망이 존재한다면 끔찍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희망을 키워나갈 수 있지 않을까. 자라나는 아이의 키 만큼 삶의 희망도 키워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글에 대한 사명감과 자유의지 그리고 대상에 대한 궁금증을 새롭게 키운 자리였다. 캐나다 대사관에서 존경하는 수잔르보의 강의를 듣고
글. 한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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