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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상자/나비의 경로

[단편희곡] 두 명의 조난자_作 한지아

by 두지아 2020. 9. 20.

두 명의 조난자

한지아

 

무대배경

나무로 만들어진 배 위. 뱃머리만 관객석 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고 배의 중앙에 선실과 그 위로 전망대가 솟아 있다. 선실 앞 하수 쪽에는 커다란 키(핸들)가 있다.

 

 

등장인물

선장 세상 밖을 항해 중인 배의 선장. 낙원을 찾고 있지만 길을 모른다.

석찬 배의 선원. 본능에 충실하며 선택과 후회를 반복한다.

(Re) 과거에 존재했던 배의 선원.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물에 빠져 죽는다.

 

 

 

 

1장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바다.

까마득한 바다 위에 낡은 배 한척이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듯 휘청이고 있다.

배 위에는 선장과 선원들이 가까스로 바람에 저항하며 버티고 있다.

그들의 실루엣만 보이다가 빙산에 반사된 빛이 무대와 객석을 비추면

선장이 다급하게 선원들에게 명령한다.

 

선장 : 빙산이다! 키를 돌려라!

 

석찬/: 키를 돌려라!

 

빙산에 반사된 빛은 점점 더 무대를 밝게 비추고

사람들은 빙산을 피하기 위해 흔들리는 배 위에서 더 분주하게 몸을 움직인다.

선장이 빙산과의 거리를 가늠하는 사이 석찬과 리는 폭풍우에 몸을 가누지 못해

키에 매달리다시피 있다. 좌로 우로 줄다리기 하듯이 키를 잡고 버티는 석찬과 리.

 

석찬 : 이쪽이야. 선장이 키를 돌리라고 했잖아.

 

: 나도 알아. 그래서 지금 키를 돌리고 있어.

 

석찬 : 그쪽이 아니라니까. 선장이 분명 이쪽으로 키를 돌리라고 말했어.

 

: 아니야. 선장은 그냥 키를 돌리라고 했어. 우리는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석찬 : 그러니까 선장이 시키는 대로..

 

빙산에 반사된 빛이 가장 밝은 빛으로 무대를 비추면 배가 빙산에 부딪친 듯

사람들 배가 기울어지는 쪽으로 낙엽처럼 쓸려나간다.

 

석찬 : (비명소리)

 

석찬이 배 끄트머리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

 

석찬 : 살려줘! 살려줘!

 

: (석찬을 향해 손을 내밀며) , 살아! 살아!

 

석찬은 리의 손을 덥석 잡는데, 죽을 것 같아 반쯤 정신이 나가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리의 손을 있는 힘껏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리는 석찬의 끌어당기는 힘의 반동으로 배 밖으로 내쳐진다. 리의 비명소리와 함께 암전

 

 

2장 죄책

 

폭풍우 소리가 잦아들고 적막이 찾아오면 무대 밝아진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선장은 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먼 바다를 내다보고 있다.

석찬은 넋이 나간 듯 초점 없는 눈으로 선실에 기대 앉아 있고 리는 없다.

 

석찬 : 선장님 뭘 그렇게 보세요?

 

선장 : 이런 때 일수록 희망을 쫓아야지.

 

석찬 : 희망.. 개나 줘버리세요. 그런 거 실제로 본 적이나 있어요?

 

선장 : (전망대에서 내려와서) 석찬아.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석찬 : 리가 없잖아요. 그럼 제 항해도 끝이란 말이죠. 집에 데려다주세요.

 

선장 : 리는 리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석찬 : 리는.. 왜 리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리가 바다에 빠졌을 때 제가 바로 구명튜브를 던졌어요. 그걸 붙잡았다면 지금 어딘가 있지 않겠어요? (상상하며) 혼자 항해하고 있을 거예요. 리는 프로니까, 살아남아서 혼자 바다 위를 둥둥 (다시 신경질적으로) 선장님은 혹시 리가 죽길 바라셨어요?

 

선장 : ...

 

석찬 : (긴 사이) 미안해요. 하지만 리는.. 살아있을 거예요.

 

선장 : (석찬을 토닥이다가) 내가 잘못했다. 맞아, 리도 어딘가에서 네가 찾으러 오길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뭐라도 먹고 기운을 좀 차려봐.

 

석찬 : 리를 찾고 나서요.

 

선장 : (한숨) 언제든 준비가 되면 말해. 마지막 참치 캔 하나는 남겨 놓을 테니까. (일어나서 선실에 들어가려다 말고 돌아서서) , 그런데 말이야. 넌 그 날 구명튜브를 던지지 않았어. 내가 저만치에 매달려서 너희 둘을 지켜보고 있었거든. 그런 건 애초에 이 배에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구명조끼라면 또 모를까.

 

석찬 : (분노가 끓어올라)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석찬이 선실로 들어가 선장의 뒷목을 잡아끌고 나온다.

 

선장 : ...어어.. 무슨 짓이야!

 

석찬 : 당신이 하는 말 다 거짓말이야. 일하지 않고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낙원에 데려다준다고 했잖아. 세상 밖으로 나가면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는! 그런 곳에 데려다준다고 했잖아.

 

선장 : 가는 길이야!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곳이 바로 거기라고!

 

석찬 : 난 리가 필요해. 같이 간다고 약속 했단 말이야!!! 다시 가! 다시! 폭풍우 속으로 다시 돌아가!! 돌아가라고!

 

석찬이 포효하는 사이 선장이 석찬을 제압해 바다로 넘겨버릴 듯 위협한다.

 

선장 : 정신 차려! 리가 필요하면 네가 직접 저 바다 속으로 찾으러 가! 알았어?

 

석찬을 배 바닥에 내팽개친다. 석찬은 바닥에 나부라져 오열한다.

 

선장 : 이러지 마. 더 이상 이런데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음식은 널 위해서 남겨둔 게 전부야. 이미 폭풍우가 왔을 때 리가 다 가지고 갔어. 비스킷은 젖었고 깡통은 전부 바다 깊숙이 가라앉았겠지. 생선들이 자기들 얼굴이 그려진 깡통이 떠내려가는 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석찬 : 날 죽일 건가요?

 

선장 : 널 왜 죽여.

 

석찬 : 나는 더 이상 이 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리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거니까.

 

선장 :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진 않아.

 

석찬 : 마지막 참치 캔까지 먹어치우면 죽이지 않고는 못 배길 걸요.

 

석찬이 선실에 있던 참치 캔을 까서 바다에 버린다.

 

석찬 : (미친놈처럼) 먹어. 먹어! 다 먹어라!

 

선장은 그런 석찬의 모습을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참치 캔을 비운 석찬은 캔을 머리 위에 탈탈 털며 원샷 제스쳐를 취하며 웃다가

그 웃음은 곧 울음으로 바뀐다.

 

석찬 : 리가 보고 싶어요.

 

선장 : 시간이 달래줄 거다. 이제 나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마음이 좀 편안해지면 그 때 오늘 못 간 길을 서둘러서 가자.

 

석찬 : ....

 

선장이 선실로 들어가면 석찬이 혼자 배 위에 남아 먼 바다를 보며 서 있다.

 

석찬 : 그 손의 촉감이 잊혀 지지가 않아. 맞아. 내가 죽인거야. 내가 나 살겠다고 리를 바다에 내던지고 혼자 배 위로 올라왔어. (횡설수설하며) 구명조끼인지 보트인지 던진 것도 내가 아니야. 뭐가 머리 위로 훅 날아가는 것 같았는데 그게 폭풍우 때문인 것 같아. 바닷물이 자꾸 눈에 들어가서 나는 계속 뱃머리에 매달려서 울었어. (사이) 선장님이 잘못한 게 아닌데. 내가 울고만 있어서. (사이) 리랑 나랑 둘이만 있었다면 좀 나았을 텐데.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진짜 그랬는지 아는 사람도 없고. 나는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니까. 그럼 이 죄책감도 금세 바닷바람에 씻겨져 나갈 텐데. 다 눈을 감으면

 

관객 쪽을 노려보던 석찬이 불안한 듯 배 위를 서성이다가

낡은 배의 나무 조각을 떼어 내

자신의 눈을 찌른다.

 

석찬 : 으악!!

 

석찬의 비명소리를 듣고 선실을 나온 선장은 석찬의 눈에서 나오는 피를 두 손으로 막는다.

석찬의 비명소리가 계속 이어지면 어느새 날씨가 변해 먹구름이 끼고

다시 폭풍우가 몰아친다. 폭풍우 소리에 파묻혀 석찬의 비명이 사그라진다. 암전

 

 

3장 석찬의 환상

 

무대 밝아지면 선장은 배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낚시를 하고 있고 눈에 붕대를 감은 석찬이

선실에 기대 앉아 있다. 배 위는 안개가 낀 어둡고 축축한 분위기다.

현실이 아닌 석찬의 환상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조명으로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석찬 : 배가 고파요. 선장님

 

선장 : 이제야 허기를 느끼나보네. 축하해. 허기를 느낀다는 건 마음의 병이 다 나은 거나 다름이 없지. 그런데 폭풍우 지난 자리라 고기가 잡히질 않아. 오늘은 계속 허탕이란 말이야.

 

사이

 

석찬 : 제가 낚싯대를 잡아 봐도 될까요?

 

선장 : 에이, 너 아직 환자야. 붕대를 푸르고 나면 실컷 부려 먹어줄게. 오늘은 좀 쉬어

 

사이

 

선장은 친절히 내뱉은 말과 달리 눈에 붕대를 감고 앉아 있는 석찬을 못마땅하게 바라본다.

 

선장 : 왜 그랬어.

 

석찬 : 견딜 수가 없었어요. 사람들 시선이.

 

선장 : 사람들이라니. 여기에는 우리 둘 뿐이야.

 

석찬 : 제가 만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강을 넘고 바다를 건너서 저한테 쏟아지는 거예요.

 

선장 : 무대 위에 있는 기분이었겠네.

 

석찬 : . 하필 주인공이 리를 살해하던 장면이었어요.

 

선장 : 그걸 죄책감이라고 하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말끔히 사라지기도 하는..

 

석찬 : . 맞아요.

 

선장 : 하지만 죽일 필요는 없었잖아.

 

석찬 : ...!

 

바다 어딘가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려온다.

 

: 사람 살려!

 

선장 : 가만. 무슨 소리 안 들려?

 

석찬 : 아뇨. 아무 소리도

 

: 살려줘!!

 

선장 : 사람! 사람이야!

 

선장이 조난자의 형태를 따라 선실 뒤편으로 간 사이 석찬은 눈앞이 보이지 않아 불안하다.

 

석찬 : 어디요, 어디. 사람이 여기 어떻게. ..제가 도울 일은 없어요? 선장님. 선장님!

 

석찬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무력함을 느낀다.

선장은 객석에서 보이지 않는 무대 안쪽(선실의 뒤쪽)에서 물에 흠뻑 젖은 리를 부축해

데리고 나온다. 추위에 떠는 것 빼고는 리의 상태는 멀쩡해 보인다.

리는 석찬을 발견하고는 반가움에 그를 덥석 껴안는다.

 

석찬 : 으악!!!!

 

석찬이 비명을 지르며 리를 뿌리치고 돌진한다. 배의 옆면에 부딪치고 나동그라지는 석찬.

 

석찬 : (다급하게) 선장님! 선장님! 살려주세요. 어디 계세요. 방금 축축한 게 닿았어요! 선장님!!

 

: (당황하며) ..나야, .

 

낚싯대를 거꾸로 들고 허공에 위협하는 석찬, 사람들 키득거리는 소리.

석찬만 바짝 긴장해있고 리와 선장은 그 모습을 재밌다는 듯 지켜보고 있다.

 

석찬 : 너 누구야! 넌 선장님이 아니야! 내가 눈이 안 보인다고 해서 귀까지 먼 것처럼 보여? 선장님을 어떻게 한 거야!

 

선장 : 나 여기 있어 석찬아. 진정해. 진정하라구

 

석찬 : 선장님. 여기 우리 말고 또 뭐가 있어요! 축축한 게 만져졌다구요!

 

선장 : 그래. 네가 기다리던 리가 다시 돌아왔어.

 

: 나야. 벌써 날 잊은 건 아니지? 눈은 왜 그런 거야.

 

리는 석찬에게 다가서려다가 석찬의 정색에 놀라 멈춰 선다.

 

석찬 : (빠르고 단호하게) 아니야!!! 선장님 놀리지 말고 솔직히 말해요. 리가 폭풍우에 떠내려 간지 일주일도 넘게 지났어. 선장님 말대로 나는 구명튜브를 던진 적도 없다고! 그럼 리가 참치 캔이라도 타고 왔다는 말이에요? 리는 죽었잖아요!

 

선장 : 맞아. 죽은 줄로만 알았지. 나도 리가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 알고 싶어.

 

: 내가 다 얘기해줄게. 전부 다

 

선장 : 그래, 진정하고 거기 좀 앉아.

 

석찬은 여전히 경계심을 지닌 채 선장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 앉고

리 역시 석찬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앉는다.

 

선장 : 마실 게 남았는지 좀 보고 올게.

 

석찬 : 가지마세요. 선장님. 제 옆에 있어요.

 

선장 : 리는 일주일 동안 바다 위를 떠 다녔어. 물 한 모금 먹지 못 했을 거라고 (석찬을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리에게 눈짓을 한 뒤 선실로 들어간다)

 

선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 왜 이러는 거야, 서운하게

 

석찬 : ...

 

: 끝까지 같이 가기로 약속 했었잖아.

 

석찬 : 믿을 수 없어.

 

선장이 선실에서 찌그러진 잔에 물을 담아 가지고 등장한다.

 

선장 : (리에게) 석찬이가 널 많이 기다렸어. 네가 폭풍우에 사라지고 나서 너를 구하지 못한 것 때문에 내내 죄책감에 시달렸거든

 

: 그런 거라면 이해 할 수 있어요. 내가 남았어도 그랬을 거야.

 

선장 : 그래, 어떻게 살아 있었던 거야.

 

리의 회상이 시작되면 그 이야기에 걸 맞는 조명과 분위기가 무대 위에 연출되는데,

회상이 계속될수록 점층적으로 안개는 짙어지고 무대 조명은 어두워진다.

리의 이야기는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두고 느리게 표현된다.

 

: 바다에 빠지는 순간 기절했던 것 같아요. 물은 너무 차가왔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부표에 머리만 반쯤 기댄 채 였으니까, 조금만 늦게 눈을 떴다면 꼼짝없이 물고기 밥이 됐을 거예요. 폭풍우는 이미 한참 저 멀리 떠내려간 뒤였고 내 손가락은 얼어붙어서 다 오그라들어 있었어요. 그 때 배꼽에서 검은 구름 같은 게 피어나왔어요.

 

선장 : 네 배꼽에서?

 

: . 바닷물에 잠겨있던 제 배꼽에서요.

 

석찬 : 우리를 속이려면 더 그럴듯한 말을 지어내!

 

선장 : (말을 가로채며) 그래, 그 검은 구름이라는 게 뭐였지?

 

: 제 공포의 실체였어요.

 

석찬 : ..

 

: 나는 곧 죽을 것처럼 춥고 무서웠지만 바다도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외쳤어요.

 

선장 : 그 검은 구름에게 말이지.

 

: 그런데 그 놈이 날 겁쟁이 취급하는 거예요. 내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걸 다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 녀석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해야만 했어요. 부표에 올라서서 다시 그놈이 내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배꼽을 껴안고 소리쳤어요. 나는 네가 두렵지 않아! 나는 네가 두렵지 않다고!

 

석찬 : 선장님. 저랑 잠깐 얘기 좀 해요.

 

선장과 석찬 둘만 작은 소리로 얘기한다.

 

석찬 : 계속 들을 필요가 있겠어요?

 

선장 : 너도 궁금하잖아. 리가 어떻게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는지

 

석찬 : 하나도 안 궁금해요. 미친 사람의 얘기. 빙하가 떠다니는 바닷물에 빠지면 바로 건져도 어지간해선 죽는 거 아시잖아요.

 

선장 : 폭풍우 속에서 일주일을 살아남았어. 안전한 육지에 닿아서 꾼 꿈일 수도 있고 쇼크 때문일지도 몰라. 일단 남은 얘기를 들어보자고

 

석찬 : 배꼽 얘기도 그래요..

 

선장 : (리를 향해 돌아서며) 그래서 그 검은 구름은 사라진 거야?

 

: 아뇨. 그 놈은 점점 더 거대해져 갔어요. 결국 제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은 전부 그 검은 구름으로 가득 차 버렸어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그 때 바다 속에서 파란 갈매기가 솟아 올라왔어요. 깃털부터 발톱까지 죄다 파란색이었어요. 바다 결에 묻혀서 보였다 안 보였다 했죠.

 

석찬 : 정말 못 들어주겠군.

 

: 그런 어둠 속에서 혼자 남는다는 게 뭔지 넌 몰라!

 

석찬 : (자신의 두 눈을 가리키며) 내가 사는 곳이 바로 그 어둠 속이야! 내가 바로 어둠이라고! 네가 진짜 리라면 넌 다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어.

 

: 뭐야?!

 

선장 : (말리며) 두 사람 다 진정해. 저 사람이 리이건 리가 아니건 우리는 결국 다시 한 배에 올랐어. 낙원까지 힘을 셋이 나눠 써야 한다고

 

: 그래 맞아! 낙원! 낙원이었어요.

 

선장 : ?

 

: 그 파란 새를 따라서 손바닥으로 노를 저어서 갔어요. 파란 갈매기가 계속 손에 닿을 듯 말 듯 앞에 아른거렸어요. 깜깜한 게 싫었기 때문에 무작정 그 파란 새를 따라 간 거예요. 가면서 파란 새한테 고백했어요. 사실은 바다가 너무 무섭다고, 이 공포를 극복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선장 : 그래, 낙원은 어떻게 생겼어. 다른 사람은 없었어?

 

: 고요하고 따뜻했어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어있던 몸이 녹아서 핑크빛이 돌았어요. 발이 닿는 곳마다 모래가 저를 안아줬거든요. 그리고 작은 새들이랑 과일나무들이 잔뜩 있었어요.

 

석찬 : (선장에게) 리는 저렇게 말 안 해요. 걔는 좀 바보 같은 편이라 말을 조리 있게 잘 못 한단 말예요. 잘 보세요. 정말 리가 맞아요?

 

선장 : 거길 다시 찾아갈 수 있겠어? 우리를 데리고 말이야.

 

: 생각 좀 해볼게요. 지금은 너무 피곤해요. 혹시 물이 남았다면 한 잔 더 주시겠어요?

 

선장 : 그래, 내가 가져다줄게.

 

: 담요도요.

 

선장 : 참치도 하나 남아 있을 거야. 전부 가져다 줄게.

 

선장이 선실로 들어가고 리와 석찬만 남는다.

 

석찬 : 무슨 꿍꿍이야.

 

: 아무것도

 

석찬 : 여기서 네가 빼먹을 거라곤 선장님이 마지막으로 가져다주는 물 한 모금 뿐 일거야. 참치 캔 같은 건 진즉에 내가 다 먹어버렸으니까. 아니, 네가 먹어버린 거야!

 

: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가 무서운 건 네가 날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 뿐 이야. 그마저도 조금 있으면 무섭지 않게 되겠지. 나는 공포에 갇혔을 때 결국 그 공포를 다시 내 배꼽 안에 가두는 법을 택했거든. 영웅의 특징이 뭔지 알아? 바로 결점을 가졌다는 거야. 우리는 두려움과도 함께 살아야 해.

 

석찬 : 네가 영웅이라도 된다는 거야?

 

: 그렇지. 이제 내가 너랑 선장님을 낙원으로 데리고 갈 거니까. 그리고 네 눈을 낫게 할 거야.

 

석찬 : , 웃기고 있네. 네가 진짜 영웅이라면 나를 네 배꼽에 구겨 넣어야 할 거야!

 

: , 그런 건 네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야. 솔직해져봐. 넌 내가 돌아와서 좋아. 맞지?

 

석찬 : (벌벌 떨다가) 그래, 좋아. 널 확실히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생긴 거잖아?

 

: 이런.. 날 죽여? 네가?

 

리는 무섭게 석찬을 몰아붙이는 듯 하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는다.

석찬에게는 그 웃음소리가 섬뜩하게 들린다.

 

: 그 콩알만한 심장으로 뭘 하겠다고.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석찬 : ...

 

: 걱정 하지 마. 지난 일은 넓은 아량으로 다 잊어 줄 테니까. 우리는 예전처럼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위로가 되어주면 돼. 일주일 동안 얼마나 외로웠다고. ?

 

선장이 물 한 컵과 담요 그리고 참치 캔을 가지고 돌아온다.

 

선장 : 빙산에 부딪쳤던 건 꿈속으로 다 사라져버린 것 같아. 우리가 여기 다시 모여앉아 있을 수 있다니 정말 하늘에 감사한 일이야.

 

참치 캔 따는 소리 들리고, 리가 맨 손으로 참치를 집어 먹는다.

 

: 이 맛은 여전하네요.

 

선장 : 선실 아래 하나 남아 있었어. 너도 좀 줄까?

 

석찬 : 저한테 주신 게 마지막이라고 하셨잖아요.

 

선장 : 그런 줄 알았지. 그런데 지금 생각지도 않은 게 하나 더 나왔으니까, 좋잖아? 낙원에 가면 늘 이런 기분일 거야. 맞지? 그렇지, ?

 

: 선장님 말이 전부 다 맞아요. 거긴 뭐든 넘쳐나요. 아침에 일어나서 손닿는 대로 과일을 따 먹었어요. 그리고 해가 떨어지면 파도에 떠 밀려 온 조개를 구워 먹었어요.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뭐든 원하면 얻을 수 있는 곳. ! 그리고 이거 (반짝이는 수정을 선장에게 건넨다) 이런 게 널렸어요. 거기서는 별로 쓸모없었지만

 

선장 : (보석에 눈이 먼 것처럼) 정말.. 정말 있어.

 

석찬 : 그렇게 좋은 델 발견했으면서 왜 다시 바다로 나왔지?

 

: 너랑 선장님을 찾기 위해서야. 혼자서는 별로 즐겁지 않았어.

 

선장 : 역시 너는 내가 선택한 최고의 선원이야!

 

석찬 : 정말 저 말을 믿으시는 거예요? 잘 들어봐요. 허점투성이라구요!

 

선장 : 낙원이라는 곳이 원래 그래.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곳. 리가 찾았다는 바로 그곳이야!

 

석찬 : 말도 안돼!

 

선장 : 삶에서 뭔갈 얻으려면 그만큼 고난을 거쳐야 하지. 우리는 긴 시간 항해를 통해서 낙원에 대한 열망을 표출해왔어. 그리고 이제 때가 된 거지, 리라는 열쇠가 우리 손에 들어온 걸 봐.

 

석찬 : 이건 삶이 아니야, 이건 똥이라고!

 

: 운명을 받아들여. 바다 쓰레기처럼 목적 없는 항해를 계속하고 싶은 거야?

 

선장 : 이제 우리도 보상을 받을 때가 됐잖아. 안 그래?

 

석찬 : 이건 보상 문제가 아니 예요. 저는 저 사람이 하는 말을 하나도 믿을 수가 없다구요! 저 사람이 데리고 가려는 곳이 낙원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래요, ..괴물의 아가리로 데려가는 걸 수도 있다구요! 좀 더 의심해 봐요!

 

선장 : 저 사람이 네가 기다리던 리야. 아직도 모르겠어?

 

: 석찬아, 제발.

 

석찬 : 내 이름 부르지 마! 난 널 몰라.

 

사이

 

: 그래 넌 예전부터 직접 본 것만 믿었으니까. 그런 애가 낙원을 찾으러 가겠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넌 낙원의 존재를 믿지 않는 거지? 그냥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거야. 넌 늘 그랬어. 문 밖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다가 용기 있게 문을 박차고 나가는 사람 뒤에 바짝 붙어서 대충 기회만 엿보는 그런 인간. 다른 걸 생각해 본 적이나 있어? 하여간 넌 영웅이 되긴 글렀어.

 

석찬 : 난 영웅이 되겠다고 한 적 없어.

 

: 그런데 왜 거짓말을 했지?

 

석찬 : 무슨 말이야.

 

: 아무렴 어때. 신경 쓰고 싶지 않으면 신경 쓰지 마.

 

선장 : (작은 소리로) 맞아, 구명튜브

 

석찬 : 구명튜브...?

 

선장 : 구명튜브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어!

 

석찬 : 내가 거짓말 했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알지! 넌 이미 바다 속으로 사라져버린 뒤의 일이야!

 

: 너무 흥분할 거 없어. 그냥 넘겨짚은 것뿐이야. 넌 늘 그 생각 언저리 밖에 못 미치거든.

 

석찬 : 으아악!! 넌 도대체 뭐야!

 

: 나야, 널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리라고. ........! 몇 번을 대답해주면 알겠어?

 

석찬은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선장은 어느새 리의 편에 서 있다.

 

선장 : 석찬아, 들려?

 

석찬 : (울먹이며) ? 저 괴물이 지껄이는 소리요?!

 

선장 : 아니야, 잘 들어 봐.

 

석찬 : (잠시 귀 기울이다가) 또 누가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나요?

 

선장 : 그런 것들이 아니야, 나한테는 너의 늦은 후회 소리가 들려. (웃음)

 

석찬 : ..!

 

선장 : 너도 우리도 다 알고 있어.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고. 너 살겠다고 동료를 바다에 내던졌고 구명튜브는 던지지도 않았어. 하지만 리가 이렇게 돌아왔잖아. 리를 인정하지 못하는 건 너의 그 죄책감 때문이야. 현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그게 어른이야. 넌 운이 더럽게 나쁜 살인자고! 좀 쿨해질 수 없어?

 

석찬 : (넋이 나간 듯) 쿨해지라고?

 

선장 : (비꼬듯) 아무래도 아까 그 소리는 네 사춘기가 오는 소리였나 보다. (리에게) 이제 네가 키를 잡아. 길을 아는 사람은 너 뿐이니까.

 

석찬 :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키는 선장님의..

 

: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석찬 : 제가 아니라, 리에게 키를 준단 말이 예요?

 

선장 : 눈 먼 장님한테 키를 맡길 것 같아? 어차피 넌 길도 모르잖아!

 

: 키를 잡기 전에 길을 먼저 알아야 해요.

 

석찬 : 저것 봐. 저 자식도 모른다잖아요. 금세 바보라는 게 들통 날 걸..

 

선장 : 어떻게 알 수 있지?

 

석찬 : 선장님!

 

선장 : 넌 닥치고 있어!

 

석찬은 선장의 호령에 놀라 얼어있다.

 

: 다시 만나야 해요. 파란 갈매기

 

선장 : 파란. 갈매기.

 

: 제가 그랬던 것처럼 공포와 맞닿는 순간이 필요해요. 파란 갈매기는 그런 순간에만 찾아오니까.

 

선장 : 이 배를 다시 찾아 올 때처럼?

 

: (고개를 끄덕인다)

 

선장 : 검은 바닷길의 인도자, 순결한 욕망, 본 적 없는 나무의 이파리, 그 뒷면이 내는 수수께끼, 검은 바닷길의 인도자, 순결한 욕망, 본 적 없는 나무의....

 

리는 선장의 읊조림을 들으며 말없이 선실 밖에 걸려있는 밧줄을 가져 온다.

선장은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리가 손발을 묶는데도 반항하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한다.

 

: 생각보다 더 차가울 거예요.

 

선장 : 그리고.. 두렵겠지.

 

: 그래요. 바로 그거에요. 두려움.

 

선장 : 파란 갈매기가 길을 알려줄 때 까지

 

: 귀를 바다에 담근 채로 깊게 심호흡을 하는 거예요.

 

선장 : 바다에 몸을 맡기고 두려움을 고백하는 거지.

 

: 그럼, 찾아올 거예요.

 

선장 : 파란. 갈매기.

 

리는 밧줄로 꽁꽁 묶인 선장을 천천히 배의 밑 둥(바다)으로 내려 보내고

선장은 어떤 장치도 없이 맨 몸으로 (낙원을 향한 열망만 가진 채) 바다로 들어간다.

그 모습은 오랜 시간 이어져온 하나의 의식처럼 보인다.

석찬은 청각을 곤두세운 채 서 있다. 배 위에는 석찬과 리만 있고 선장은 없다.

고요가 계속되자

 

석찬 : 선장님은?

 

: ?

 

석찬 : 선장님은 지금 어디 있어. 파란 갈매기는?

 

: 너는 그 말을 안 믿는 줄 알았는데

 

석찬 : 믿겠다는 얘기는 아니야. 지금 선장님이 파란 갈매기를 찾으러 어디론가 가버렸으니까 하는 말이지.

 

: 어디론가.. 어딜까 거기가.

 

석찬 : ?

 

: 너도 알잖아. 바닷물에 빠지면 바로 건져도 어지간해선 죽는 거.

 

석찬 : 지금 선장님이 죽도록 내버려뒀다는 거야?

 

: 말리지 않았을 뿐이야.

 

석찬 : ! 대체 왜!!

 

: 구명튜브라도 던졌어야 했나? ! 없지 그런 거.

 

석찬이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석찬 : 그럴 리가 없어.

 

: 좋을 대로 생각해. 너 짜 맞추는 거 잘 하잖아. 이번엔 뭐야. 상상력을 발휘해 봐.

 

석찬 : ...

 

: 구상이 끝나면 말해. 그 때 오늘 못 간 길을 서둘러서 가지 뭐.

 

석찬 : ?

 

: 뭐가

 

석찬 : 지금 방금 뭐라고 했어?

 

: 구상이 끝나면 말 하라고

 

석찬 : 그 다음에

 

: 그 때 오늘 못 간 길을 서둘러서 가자고. ?

 

석찬 : . 다행이다. 나는 선장님이 정말 죽은 줄 알고...

 

리가 아무 말 없이 석찬을 한참 바라보다가 선실 뒤편으로 나간다.

 

석찬 : 그 목소리가 잊혀 지지가 않아요. 모르는 척 하고 싶은데 자꾸만 나를 부르는 거예요. 자꾸만. 듣고 싶지 않아서 나는 더 큰 소리로 외쳤어요. 나는 네가 두렵지 않아! 나는 네가 두렵지 않다고!! (사이) 선장님이 잘못한 게 아닌데 내가 울고만 있어서 (사이) 리랑 나랑 둘이만 있었다면 좀 나았을 텐데.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진짜 그랬는지 아는 사람도 없고. 나는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니까

 

석찬이 독백하는 사이 안개가 걷히고 현실로 돌아온다.

 

 

4장 낙원으로

 

선실에서 선장이 담요를 몸에 두르고 나온다. (담요는 선장이 리에게 건네줬던 것과 같다)

환상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온 시점으로 안개가 걷히고 조명이 처음과 같이 무대를 비춘다.

 

선장 : 석찬아. 오늘은 컨디션이 좀 어때?

 

석찬 : (사이) 선장님은 왜 항해를 시작하셨어요?

 

선장 : 세상이 지겨워서. 세상 밖으로 나가면 좀 그럴듯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거든.

 

석찬 : 고작 그런 이유란 말이 예요?

 

선장 : 고작이라니. 나는 고작 그만한 이유 보다 더 좋은 이유를 찾지 못했어. ?

 

석찬 :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선장 : . 싱겁긴

 

선장은 담요를 석찬에게 덮어주고 뱃머리에 다가가 선다.

 

선장 : 너나 나나 인간은 다 똑같아. 언제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세상에서 만족하고 살기란 쉽지 않지. 결국은 욕심이 더 많은, 겁이 더 많은 사람들이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이라도 더 적은 세상에서 떳떳하게 살아 보려고.

 

석찬 : 아직도 낙원이 있다고 믿으세요?

 

선장 : 아직도 라니, 나는 단 한 번도 낙원의 존재를 의심해본 적이 없어. 어떻게 가야할지를 모를 뿐이지.

 

석찬 : 저는 이제 알아요. (선장이 석찬을 향해 돌아본다) 제가 데려다 드릴 게요.

 

석찬이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담요를 던진다. 선장이 뒤집어 씌워진 담요를 벗는 사이

석찬이 재빨리 자신의 눈을 감고 있던 붕대를 풀어 선장의 목을 조른다.

 

석찬 : (점점 흥분이 고조되며) 겁을 내세요. 공포와 마주해야 갈매기가 찾아온대요. 작은 새와 과일나무요. 선장님은 그냥 가만히 있어요. 어차피 넌 길도 모르잖아!!

 

선장의 숨이 멎고 뱃머리 위에 빨래처럼 널어진다. 석찬은 느린 걸음으로 전망대에 오른다.

 

석찬 : (읊조리듯) 나는 죽음보다 결백해. 나는 이 지옥 같은 세상으로부터 모두를 구한 구원자야. 나는 영웅이고 파란 갈매기다!

 

석찬은 전망대 난간에 올라서서 울다가 갈매기 소리를 낸다.

석찬이 내는 갈매기 울음소리가 커지면 날이 어두워지고 우박이 떨어진다.

우박에 머리를 맞은 석찬이 전망대 아래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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