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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상자/생각 정리

은희경 <타인에게 말걸기>

by 두지아 2017. 3. 11.
나는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이든 틈입자일 뿐이며,
사실 우리는 그렇게 틈을 내줄 마음이 없으므로 당신은
초라한 틈입자인 거죠. 아, 여보세요?
 
빗소리가 거세게 귀청을 때렸다.
 
 
 
 
 
 
사랑의 존위와 진실성에 대해서 유난히 신중하거나
의심 많은 사람은 아직도 그들 감정의 특별하고도 위대한 점을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상대를
그 정도로 미화하는 기술쯤은 저절로 터득하는 법이니까.
 
사실 연인들은 사랑이라는 최면과 자기암시를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자주 실험해보며 그러는 가운데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몇 가지
방법을 알게 된다. 몇몇 그 방면에 뛰어난 사람들은 마치
전문의가 일회용품이자 소모품인 처녀의 피막을 바느질로
재생해내듯 자신의 지나간 모든 사랑을 봉합함으로써
감정의 순결을 새것처럼 수선하여 바치는 기교까지 익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사랑에 빠졌어'라는 자기 암시와
'저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야'라는 최면에다가
'이것이야말로 나의 진짜 첫사랑이야'하는 망상의 세 가지
구색이 다 갖춰지는 셈이다.

 
 
 
* * *
 
 
 
전자게임은 생각을 동원하는 게 아니라 감각을 적응시키는 거에요.
눈앞에 뭔가가 닥쳐오기 때문에 무조건 쏘는 거라구.
당신처럼 여러 각도에서 생각하고 의미까지를 저울질하고
그런 넋빠진 짓을 하다가는 몇 초 지나지 않아서 인생이라는
모니터에 게임오버 메시지가 나타날 뿐이야.
 
뭘 선택할까 생각을 깊이 하거나 뒤를 돌아보면 안 돼요.
조금 전까지 사랑했던 것들이 왜 폐기되어야 하는지
생각할 틈 없이 이미 쓰레기로 변한 그 과거를 탄피처럼
질질 흘려가면서, 어느 방향에서 갑자기 나타날지 모르는
미확인 물체를 향해 순간적으로 총을 쏘면서 겨우
한 발짝 앞으로 딛는 것, 그것이 이 세상이란 말예요.

 
 
 
그녀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치 신세계의 요정처럼, 그리고 등뼈에 통증을 못 느낀다는
신화 속의 마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