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출산과 동시에 임신주수 같은 것은 잊어버렸다. 아마 38주 5일즈음일거다. 아기는 2025/10/20 오전 8:33에 몸무게 3.54kg / 키 53.0cm / 머리둘레 36.0cm 제왕절개로 태어났다. 나는 말초신경장애 보유자로서 제왕절개가 선물하는 통증에 감각이상을 더하여 '여전히' 회복중이며 오늘로 아기는 D+37일이 되었다.
아기와의 첫 만남은 생각보다 감동적이지 않았다.
배가 아직 열린 상태로 목소리만 들리는 간호사가 아기를 데려다 얼굴에 대주었고 너무 가까워서 눈으로 아기의 모습을 확인하긴 어려웠다. 왜 그렇게 가까이 대주었던걸까. 이제 사십이 넘어 시력저하와 함께 밥 먹던 숟가락도 눈 앞에서 사라지는 상태인데 말이다. 하여간 간호사가 아기 얼굴을 내 볼에 대주니 아기 울음이 긋쳤던 기억이 난다. 몇 초만에 아기는 다음 단계(?)로 이동했고 나는 곧 수면마취 상태로 들어갔다.
아기를 다시 만난건 수술 당일 오후였다. 보통은 제왕절개를 한 산모가 수술 당일날 움직이기는 어렵다고 하는데 나는 제법 움직일만 해서 바깥양반의 휠체어 핸들링 하에 신생아실로 향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복부를 여러겹 가르고 다시 꿰맨지 얼마 안 된 때인데 정신이 약에 취했었나보다.
유리벽 넘어 탱탱 불은 아기는 낯선 얼굴이었다.
도무지 우리 아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분명히 수술실에서 내가 마취된 사이 가름막천 뒤에서 무슨 거래가 있었던게 아닐까 의심스러운 지경이었다. 나와 바깥양반을 둘 다 닮지 않아 보였다. 이 낯설음은 모유수유할 때에도, 퇴원할 때 까지도 계속 되었다. 젖을 물려야 하는데 '남의 아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면 정말 혼란스럽다. 그 혼란이 유선(젖샘)을 타고 흐를까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 거울을 보는데 퉁퉁 불어 너무나도 낯선 내가 거기 있었다.
병원에서의 일정은 대략 새벽 5시부터 시작된다. 온갖 검사, 주사, 약처방, 담당의 회진 등이 아침식사(7시) 전에 그야말로 들이닥친다. 저절로 아침형 인간이 되는데 깜빡 졸았다 싶으면 눈 앞에 의사와 그의 무리들이 눈 앞에 서 있다. 마음은 놀라 벌떡 일어났지만 몸은 통증 투성이라 엉거주춤하다보면 '일어나지 마세요!'라는 소리를 듣고 그대로 눕게 된다. 그렇게 버릇없이 상전처럼 누워서 담당의와 몇 마디를 주고받다보면 괜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든다. 삼신 할아버지 앞에 이게 무슨 자세란 말인가..
수술 다음 날, 아기와 대면하기 위해 모유수유 만남을 신청했다. 무슨 용기였을까, 진짜 내 새끼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가슴을 소독패드로 닦고, 처음으로 수유쿠션을 끼우고, 처음으로 아기를 안고, 처음으로... 처음이었다. 모든 게 낯설었다. 하지만 아기는 망설임 없이 젖을 덥썩 물었고 간호사 선생님이 '자세를 가르쳐줄 필요도 없이 너무 잘 하네요' 칭찬하고 방을 나갔다. 갓 자궁밖을 나온 네가 느끼는 낯설음의 크기가 나의 것보다 더 클텐데,라고 생각하며 아기의 생존본능에 감탄하고 또 고마웠다. 그렇게 내가 느끼던 낯설음의 일부를 아기의 오물대던 입이 지웠다. 이후로 한 번도 빠짐없이 모유수유 만남을 신청했고 우리는 한 모금씩 가까워졌다.
육아도 벼락치기가 될까.
입원 3일차 되던 날, 담당의가 보기에도 내가 쌩쌩해보였는지 조기퇴원 의향을 물었다(제발 쉬라는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병실침대에서 노트북을 펼쳐놓고 일했으니 쫓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일찍 퇴원하나 늦게 퇴원하나 애석하게도 가족들이 해외여행 떠나고 없는 빈 집은 달라질 게 없었다. 경험주의 관점에서 하드코어하게 레벨업하기 위해서는 조기퇴원하고 우당퉁탕 독박육아도 하루치 일찍 경험해보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퇴원 전 날 오전 일찍 주렁주렁 달려있던 주사바늘을 모두 제거했다. 화장실 갈 때 마다 주머니에서 떨어지던 페인부스터 뗄 때가 제일 속시원했다. 하지만 인생이 그리 쉽나, 모든게 정리된다 싶었던 때 철분이 부족하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고 헤모글로빈을 추가로 투액해야 해서 다시 링거바늘을 꽂았다. 그리고 아마도 오로량 때문에 자궁수축제를 2차로 맞았다. 마취성 진통제를 떼어내서 그런지 주사가 삽입되는 동시에 가슴이 찌릿하고 이내 자궁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건 나의 특이점인 '감각이상' 증상 덕분에 감각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자궁수축제 투입 즉시 내 몸은 자궁이 수축하며 '아기가 빠져나갔음'을 인식했고, 젖몸살이 왔다.
늦은 밤, 다음 날 퇴원한다고 생각하니 준비하지 못한 일들이 아지랑이처럼 드문드문 피어올랐다. 잠들기 직전까지 유투브로 육아를 공부했고 특히 아기 목욕하는 법을 열공했다.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촬영한 가이드 영상이었는데 실제로 도움이 많이 되었다(https://www.youtube.com/@KyungheeUnivMedicalCenter). 반복해서 시청하고 눈을 감고 준비물을 세팅하고 메뉴얼대로 이미지 트레이닝하는 방식으로 거듭 연습했다. 낯설고 두려운 게 다 무어냐, 아이엠 마더다.
온라인으로 만난 육아고수들의 비법은 대부분 옳았고 일부는 서로 주장하는 바가 상충되었다. 결론은 애바애(애기 by 애기)로 정답은 내 품 안에 있는 이 작은 사람과의 협의에 달려있었다. 수많은 육아 콘텐츠를 섭렵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암묵지가 흡수되는 느낌이 있었고 이제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나름의 트림 비법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4시간이 넘게 아기를 바닥에 내려놓지 못하고 팔 근육만 단련하고 있지만…나름대로 괜찮아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오늘 저녁엔 반항기어린 심정으로 에너지 음료를 마셨다.
반수면 상태로 육아와 학업 그리고 재택근무라는 삼중고를 자처하면서 언제든 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아기와 내가 닮은 점이랄까ㅎㅎ 오늘은 저녁에 마신 에너지 음료 덕분에 이렇게 유축도 재끼고 글을 쓴다. 글쓰기는 힐링이구나. 다음에는 '나의 임신, 나의 철분, 나의 치질'을 주제로 글을 써볼까 한다. 현재 진행형임으로 망각의 영역에 들어서지 않았으니 생명력 있는 글이 나올 것 같다...
아기의 눈이 무거워졌음으로 여기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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